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 드 브르타뉴 (문단 편집) === 두 번의 왕비 대관식 === 1491년 안은 [[샤를 8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국]]의 왕비가 되었고, 다음 해에 [[생 드니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지만 안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7년간의 결혼생활 중 무려 6번이나 임신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산되거나 요절하였고, 프랑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누이 안 드 보주 때문에 안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브르타뉴|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으로서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1498년 4월 4일 남편 [[샤를 8세]]가 문틀에 머리를 부딪히는 어이없는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안과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안은 결혼 계약대로 다음 국왕인 [[루이 12세]]와 결혼해야 했다. 루이 12세는 샤를 8세의 누나인 프랑스의 잔과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강요된 결혼이었다는 핑계로 혼인을 무효화시키고 안과 결혼했다. 1504년 [[생 드니 대성당]]에서 두 번째 대관식이 거행됐고 안은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이나 왕비가 된 인물이 되었다. [[샤를 8세]]의 왕비이던 시절과는 다르게 [[루이 12세]]의 왕비로서 안은 [[브르타뉴]] 여공작의 지위를 회복했다. 또 브르타뉴 공작위를 차남이나 딸에게 상속하여 [[프랑스]] 왕위와 분리할 것을 보장받았고, 장녀 클로드를 후계자로 삼았다. 안은 브르타뉴가 보이는 블루아 성에서 살았으며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안은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스페인]]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딸 클로드를 [[카를 5세|카를 대공]]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어떻게든 브르타뉴 공국을 얻어보려는-- 남편 루이 12세는 그녀를 프랑스 차기 왕위계승자인 [[프랑수아 1세|앙굴렘의 프랑수아]]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루이 12세와 안 사이에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브르타뉴 여공작이 될 클로드가 왕위계승자인 프랑수아와 결혼을 한다면 브르타뉴 공국도 프랑스에 합병이 된다.]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와 합병되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던 안은 죽을 때까지 클로드와 프랑수아의 결혼을 반대했고, 공국을 차녀 르네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루이 12세는 이러한 안의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은 여행을 명분으로 각국을 돌아다니며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을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